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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trea-Ethiopia Boundary Commission (Eritrea v. Ethiopia, PCA 2001-01) 본문

Eritrea-Ethiopia Boundary Commission (Eritrea v. Ethiopia, PCA 2001-01)

국제분쟁 판례해설/상설중재재판소(PCA) 판례 2023. 9. 7.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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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trea-Ethiopia Boundary Commission

[Eritrea v. Ethiopia, PCA 2001-01]1)

 


I. 개관


1. 당사자와 대리인


가. 신청국


본 사건의 원고는 에리트레아이며, 미국 Covington & Burling 로펌 소속 변호사들이 원고를 대리하였다. 


나. 피신청국


본 사건의 피고는 에티오피아 연방 민주 공화국(“에티오피아”)이며, Verner, Liipfert, Bernhard, McPherson & Hand 로펌 및 Frere Cholmeley/Eversheds 로펌 소속 변호사들이 피고를 공동 대리하였다. 


2. 배경 사실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에 의하여 잠시 합병된 시기를 제외하고 계속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여 온 반면, 에리트레아는 오랜 기간 동안 타국(오스만 투르크, 이집트, 이탈리아 등)의 식민지배를 받아왔다. 


구체적으로 1880년대에 들어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를 점령하고 계속하여 인접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세력 확장은 인접국인 에티오피아와 마찰을 일으켰는데, 양국은 1889년 우치알리 조약(Treaty of Uccialli)을 체결하고 에티오피아와 당시 이탈리아 점령 하에 있던 에리트레아 지역 사이의 국경을 획정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양국 간 국경에서 분쟁은 지속되었고 양국은 1900년, 1902년, 및 1908년 세 차례에 걸쳐 별도의 조약(이하 각각 “1900년 조약”, “1902년 조약”, “1908년 조약” 이라 하며, 총칭하여 “본 사건 조약들”)을 체결하여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식민 지역간 동부, 중부 및 서부 지역의 경계를 획정하였다.2)


본 사건 조약들은 각각 별도의 국경지역을 나누어 다루고 있으나 지도상에 명확히 그 지점을 표기할 수 있는 수준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1900년, 1902년 및 1908년 조약은 각각 중부, 서부, 동부 국경과 관련이 있는데(“분쟁지역”, 아래 지도 1 참조), 이들 조약들은 각 지역별로 당시 통용되던 지형 및 자연 형상의 명칭을 사용하여 전체적인 맥락에서의 경계 획정 만을 시도하였을 뿐이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가 각각 이탈리아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게 되자 에티오피아 및 에리트레아 양국의 갈등은 재차 발생하게 되었다. 양국 간 분쟁을 해결하는 방안의 하나로 1950. 12. 2. UN 총회는 결의 390 A(V)를 채택하여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와 연합국을 구성하도록 하였고 이에 따라 1952. 9. 11.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연방이 창설되었다.3)


그러나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기를 희망하였고, 이는 곧 양국 사이의 분쟁 및 긴장을 다시 유발하게 되었다. 1990년대까지도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1993. 4. 에리트레아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의 결과, 투표자의 99% 이상이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 선거를 감시하기 위하여 파견된 UN 특사도 이 국민투표 절차가 공정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되 었음을 선언하면서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위한 국제적 분위기는 무르익어가게 되었다.4)


결국, 1993. 4. 27.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하였고 별도의 UN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뒤이어 1993. 4. 29.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의 독립과 주권을 승인하였고 1993. 7. 30. 양국 정부는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였다.5)


하지만 우호협력조약에도 불구하고 3건의 조약의 비구체성으로 인한 양국간 국경 문제는 국경에서의 분쟁을 지속적으로 야기하였고 급기야 1998. 5. 양국간 무력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1998년 군사적 충돌 이후에 에티오피아 및 에리트레아 정부는 2000. 12. 12. “에리트레아 정부와 에티오피아 민주연방공화국간 협정”으로 불리는 조약(이하 “알제리 협정”)을 체결하고 알제리 협정에 따른 분쟁해결을 시도하였다.6)


[지도 1] 분쟁지역.7)

 


3. 중재판정부 구성 절차


알제리 협정 제4조에 따르면, 양국 간의 국경 문제는 국경 위원회(Boundary Commission)를 구성하여 결정하여야 한다. 

 

알제리 협정 제4조 제2항

당사자들은 관련 식민 조약(1900년, 1902년 및 1908년) 및 적용 가능한 국제법에 따라 식민 조약 국경을 구분하고 구분할 권한을 가진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중립 경계 위원회를 설립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위원회는 형평과 선에 따라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


이에 따라 국경위원회의 위원 5인이 중재판정부를 구성하여 본건 판정을 내렸으며, 상설중재재판소(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 이하 “PCA”)는 중재기관으로서 본 사건의 행정적 관리 업무를 담당하였다.8)


중재판정부는 양 당사국의 국경을 획정하기 위해서는, 조약, 국제법, 당사국의 관행, 정상회의 결의 등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설시하면서, 이러한 기준에 따라 3건의 조약에 따른 양 당사국 국경을 구역 별로 상세하게 획정하였다. 


II. 사건 및 판정의 세부 사항


1. 주요 쟁점

 

  • 1900년 조약에 따른 국경 획정 (중부)
  • 1902년 조약에 따른 국경 획정 (서부 지역)
  • 1908년 조약에 따른 국경 획정 (동부 지역)


2. 근거가 된 국제법상 법원


본 사건에서는 (i) 상기 3건의 본 사건 조약들, (ii) 적용 가능한 국제법, 그리고 (iii) 1964년 카이로에서 열린 아프리카 단결기구(Organization of African Unity, “OAU”) 정상회의 결의 등이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 


3. 주요 쟁점별 중재판정부의 판단


가. 판단 기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는 각 자신들이 생각하는 양국간 경계에 관한 지도 및 그림을 제출하면서 본 사건 조약들을 필요에 따라 원용하였다.


중재판정부는 양국의 경계를 정함에 있어 그들의 관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라 보아, 양 당사국의 역사와 관계에 관하여 간략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 분쟁 대상이 된 지역에 대한 지리적 설명을 하는 것을 분쟁해결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이를 기초로 중재판정부는 본건 해결을 위하여 (i) 본 사건 조약들, (ii) 적용 가능한 국제법 및 당사국의 추후 관행, 그리고 (iii) 1964년 카이로에서 열린 OAU 정상회의 칭한다.

결의 등을 판단 기준 또는 적용법규로 삼았다. 중재판정부는 위 판단 기준을 기초로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 사이의 경계선을 결정하였다.9)


(1) 본 사건 조약들


중재판정부는 본 사건 조약들의 의미를 확인하는 작업은 이 분쟁의 핵심이라고 판단하였다.10) 이 조약을 해석함에 있어 중재판정부는 조약은 문맥과 그 대상과 목적을 고려한 통상의 의미에 따라 신의성실하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조약 해석의 일반원칙을 적용하였다.11) 중재판정부는 이러한 조약을 해석함에 있어서 “동시대 의미 적용의 원칙 (contemporaneity)”을 적용하였는데, 이 원칙은 조약 체결 당시의 상황에 기초하여 조약을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 나아가 조약에 사용된 표현 (명칭을 포함하여)에 대하여 조약 체결 당시 사용되던 표현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하였다.12)


(2) 적용가능한 국제법 및 당사국의 추후 관행


또한 중재판정부는 “적용가능한 국제법”의 일환으로 조약 체결 이후 양 당사국의 추후 관행 및 행위도 고려하였다. 즉, 중재판정부는 당사국의 추후 관행에 적용되는 법원칙을 포함한 국가간 경계획정 분쟁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국제법 원칙도 적용할 필요가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13) 구체적으로 중재판정부는 양 당사국의 추후 관행을 크게 3가지로 나누어14) ① 지도15), ② 행위를 실시하는 국가의 주권행사임을 보여주는 실제 행위(effectivités)16), ③ 중재판정부의 심리 과정에서 주권의 행사와 관련하여 인정한 사항 또는 그러한 사항에 대한 타방 당사국의 묵인 또는 반대를 포함하는 다양한 외교 서신, 여타 서신 및 기록 등17)을 검토 대상으로 삼았다.


(3) 1964년 카이로에서 열린 OAU 정상회의 결의


마지막으로 중재판정부는 1964년 카이로에서 개최된 OAU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결의 AHG/Res. 16(1)에 언급된 “uti possidetis juris”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한 신생 국가의 경우 독립 당시 국경, 즉 독립 이전부터 구 체제하에서 사용되던 행정적 구획을 존중한다는 국제관습법의 원칙)18)를 양 당사국이 모두 인정하고 수용하였음에 주목하고, 해당 원칙을 판단 기준의 하나로 삼았다.19)


나. 중부지역


(1) 에리트레아의 주장


에리트레아는 조약상의 이 지도가 중재판정부가 마레브(Mareb)-벨레사(Belesa)-무나(Muna) 선에서 양 당사국간 이견이 존재하는 지점들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20)


따라서 에리트레아는 동 지도가 육지 연결로를 통하여 무나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주는 벨레사의 지류가 동 조약상 지도의 기초를 이루는 1894년 조약상 지도에 나타나는 그 강의 서쪽 지류와 합치하며, 또한 이 선은 방향을 전환하여 남쪽 방향으로 진행하여 조그만 개천이 되어 벨레사를 떠나 무나가 분수령의 동쪽 지역 (Point 20)으로 상승하는 지점에서 무나를 만날 때까지 정 동쪽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있다.21)


(2) 에티오피아의 주장


반면, 에티오피아는 1990년 조약은 아래와 같이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마레브-벨레사-무나 선의 공식은 이탈리아 통치하에 있던 북쪽의 아첼레 구자이(Acchele Guzai) 구역과 아비시니아의 통치하에 있던 남쪽의 아가메(Agame) 구역간 실질적인 행정적 구분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에티오피아에 따르면 중재판정부의 임무는 지리학적 개념에서 이 조약의 마레브-벨레사무나 선의 공식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첼레 구자이 구역과 아가메 구역의 그 당시 실제 경계를 결정하는데 있다는 것이다.22)


둘째, 1900년 조약에 부속된 지도와 인공위성 관측으로 작성된 현대 지도와의 비교에 기초하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1900년 조약이 관련된 지형을 정확하게 표기하고 있지 않음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1900년 지도상의 하천은 현대 지도상의 하천과 합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3)


셋째, “벨레사” 및 “무나”라는 이름들은 이 지역의 관련 하천을 기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에티오피아는 “벨레사”의 서부 지류를 “루바이 다로”로, 동부 지류를 “메스타이 메스”로 부르고 있으며 특히 후자는 “수르”와 합류한다. “베르베로 가도”라는 이름은 1900년 조약의 지도가 “무나”라고 부르는 하천에 부여되어 있다. 에티오피아는 1900년 조약상 지도에 표기된 “무나”라는 하천은 사실 1900년 시점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에티오피아는 또한 베르베로 가도는 자신보다 큰 하천으로서 그 원천을 북쪽 지점에 두고 있는 엔델리의 일부를 구성하고 이 하천은 아첼레 구자이 구역과 아가메 구역간 경계를 구성하였으며 따라서 1900년 조약상 지도에 “무나”라고 표기된 경계가 따라야 할 선은 바로 이 하천선임을 주장한다.24)


(3) 중재판정부의 판단


중재판정부는 1900년 조약이 축약적인 용어로 경계를 묘사하여 “Mareb-Belesa-Muna”라는 세 강의 이름만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경계획정이 육지 경계를 나누는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을 고려하면, 조약에서의 묘사는 상세한 설명이 부족하고 해당 지역의 지형과 그에 붙여진 이름이 불분명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더구나 강은 다양한 흐름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려진 사실도 인정하였다.25)


그러나 중재판정부는 당사국들은 동 조약에서 “부속된 지도상” 이라는 단서를 추가하여 그들의 합의를 명확히 하였으며, “조약의 지도”라고 언급될 그 지도는 경계를 획정함에 있어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확인하였다.26)


다만, 지도에서 사용한 주요 지형의 명명이 다소 상이하여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중재판정부는 당사국들이 조약에서 말한 것과 조약의 지도에 나타난 것을 근거로 조약 체결 당시 각 당사자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밝혀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중재판정부는 지도는 현재의 지식과 심각하게 불일치 하여 무가치하다는 판단이 들지 않는 한, 당사국들의 의도했던 바를 나타내는 가치를 지닌다고 보고, 중재판정부는 상대적으로 작은 불일치에 근거하여 결과를 섣불리 판단하지는 않을 것이라 밝혔다.27)


이러한 기준에 따라 중재판정부는 양국 간의 경계를 다음과 같이 판단하였다.28)

 

  • 경계는 Mareb와 Mai Ambessa의 합류지점(Point 9)에서 시작된다.
  • Mareb를 동쪽방향으로 따라 Belesa 합류지점(Point 11)까지 이어진다.
  • 그 후 Belesa가 Belesa A와 Belesa B(Point 12)가 합류하는 지점까지 Belesa의 상류를 따라 올라간다.
  • Point 12의 동쪽과 동남쪽으로 경계는 Belesa B로 올라가고, Tserona와 그 환경을 에리트레아에 남기듯이 그 강으로부터 벗어난다. 경계는 Tserona의 현재 테두리로부터 나중에 분계단계에서 더 정확하게 결정되어야 하는 방법으로 약 1km 떨어져 돌아간다.
  • 그 후에 경계는 Belesa B와 다시 합류하면서 Point 14까지 그 강을 남쪽으로 따라가며 그 방향으로 흐르는 이름없는 지류를 지나 그 지류의 원천인 Point 15를 향해 서남쪽으로 휘게 된다. 여기서 경계는 분수령을 Belesa A 지류의 원천인 Point 16으로 향하여 일직선으로 통과하고 그 지류를 따라 Belesa A와의 합류지점인 Point 17로 오게 된다. 그리고 경계는 Belesa A를 다시 따라 올라가 Point 18까지 Fort Cadorna와 그 환경을 에리트레아에 남겨두듯 에리트레아 claim line을 따라가게 된다. 에리트레아 claim line은 2001. 12. 20. final submission 날 에리트레아가 제출한 소련의 1:100,000 축척도에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Point 18이 Adigrat에서 Zalambessa로 이어지는 도로의 중심으로부터 100m 서쪽에 표시되어 있다.
  • 경계는 Point 18에서 그 도로의 중심으로부터 100m 떨어져 평행하게 Zalambessa 방향으로 그 도시의 현재 바깥쪽 edge에서 1km 남쪽까지 서쪽을 따라가게 표시되어 있다. 이 도시와 환경을 에티오피아에 남겨두기 위해 경계는 Point 20에서 Treaty line을 만날 때까지 서북쪽으로 현재 Zalambessa의 outer edge를 1km 떨어져 돌아서 지나가되, 이전 에리트레아 세관사무소들을 에리트레아 영역에 남겨지도록 하였다. 현재 Zalambessa의 바깥테두리는 분계단계에서 더 정확히 결정될 것이다.
  • 경계는 Point 20에서 Enda Dahim을 Point 21에서 만날 때까지 Muna를 지나간다.
  • Point 21에서 경계는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Enda Dashim을 Point 22까지 올라간다. 여기서 경계는 북쪽으로 가기 위해 이 강에서 벗어나 one of the 지류들을 따라 Point 23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경계는 동북방향으로 더 높은 지류를 따라 그 원천인 Point 24에 도달한다.
  • Point 24에서 경계는 일직선으로 Endeli의 지류들 중 상류수에 속하는 지류의 source인 Point 25까지 육상으로 지나가며, 경계는 그 지류를 따라 Endeli를 point 26에서 만나게 된다.
  • Point 26에서 경계는 Endeli에서 Muna와의 합류지점(point 27)로 하강한다.
  • Point 27에서 경계는 Muna/Endeli 하류를 따라 이어진다. Point 28 근처에 있는 Rendacoma에서 경계는 Ragali라고도 불리게 표시(그려져)되어 있다.
  • 이 선은 Point 28에서 Salt Lake의 서북쪽에 있는 Point 29를 향해 Muna/Endeli/Ragali에서 하강하며, 일직선으로 Point 30과 31로 가는데 이 영역의 마지막 지점에서 경계가 종결된다.

 


[지도 2] 중부 지역의 경계 획정29)

 


 
다. 서부 지역의 경계 획정


(1) 에리트레아의 주장


에리트레아는 1902년 조약의 핵심지역인 세티트-마레브(Setit-Mareb) 지역과 관련하여, 동 조약이 경계의 기준으로 삼는 강의 명칭은 “마이테브(Maieteb)”가 아니라 “마이테네(Mai Tenné)”라고 주장했다. 에리트레아는 또한 조약에서 가리키는 “Maiteb”는 사실 Sittona (point 4)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혼동하여서는 아니된다고 하였다. 


결국, 에리트레아는 마이테네강은 마이테브강의 서쪽 부분의 동쪽으로 87km 정도의 지점(point 8)에서 세티트(Setit)에 합쳐지는데, 이 합류 지점으로부터 포인트 9까지의 직선으로 경계를 획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0)

(2) 에티오피아의 주장
 
에티오피아는 국경은 먼저 마이테브(Maieteb) 강의 수원을 기준으로 하고 오로지 여기에서부터 북동쪽으로 직선으로 진행하여야 함을 주장하였다.31)


구체적으로 에티오피아는 조약에서 “Maieteb”는 포인트 9로 직선이 그려진 부분에서 출발해 북서쪽의 포인트 3에서 세티트에 도달하는 강의 이름이라고 하면서 그들이 제출한 지도에 그려진 대로 이 선은 65도에서 73도 사이의 각도로 북동쪽을 향하고 있다고 하였다.32)


(3) 중재판정부의 판단


(가) 조약의 해석


중재판정부는 본 사건 분쟁의 해결은 1902년 조약의 해석 문제에 달려있다고 보고, 아래 사항들을 검토함으로써 당사자들의 “공통된 의지(common will)”를 결정해야 한다고 보았다.33)


1) 조약의 용어


중재판정부는 1902년 조약에 사용된 지리적 명칭의 의미와 효과는 조약 체결 당시에 해당 명칭이 지칭하는 것이 현재의 어디에 해당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판시하면서, 본 사건의 경우 당시에 여러 가지 지도가 사용되었기에 검토가 더욱 어렵다고 하였다.34)


에티오피아는 1901년 Anglo-Egyption Sudan 지도를 제출했고 이와 거의 동일한 동시대의 지도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35) 그러나 중재판 정부는 여러 가지 지도 중 1902년 조약 체결 당시 이탈리아 측 협상자였던Ciccodicola 소령의 1902. 5. 16.(조약 체결 직후) 보고서에 언급되고 1902. 6. 28. 보고서에 첨부된 지도인 Mai Daro 지도가 조약 협상에 당시에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36) 더구나 Mai Daro 지도는 1900년 조약 체결 당시 기초가 되었다고 명시된 de Chaurand 지도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중재판정부는 이 지도를 중요하고 증거가치 높은 자료로 보았다.37)


2) 조약의 목적
 
중재판정부에 의하면, 1902년 조약의 목적은 일반 수준(general level)과 특별 수준(particular level)의 두 가지 수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일반 수준에서는, 1902년 조약의 목적이 국경을 정하기 위한 것임이 명백하지만 이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38)

 

중요한 것은 특별 수준인데, 중재판정부는 1902년 조약 제1조에서 “Cunama 부족이 에리트레아에 속하도록” 국경선을 획정하였다는 언급이 중요성을 가진다고 보았다.39)


이탈리아 외교부 장관이 1897. 3. 22. 총영사에게 주었던 지침에서 “Cunama 부족이 에리트레아 식민지에 더해지도록” 할 것을 요구한 점, 1901. 11. 22. 영국과 이탈리아 사이에 체결된 비밀 협정(Confidential Arrangement) 제5항도 국경선 획정과 관련하여 “에 리트레아에 Kunama 부족 전부를 Mareb에 이르기까지” 주게 될 것이라고 언급한 점, 1902년 조약 제1조에서도 국경선을 “Canama [sic] 부족이 에리트레아에 속하도록” 획정한다는 취지가 기재된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명시적인 목적의 중요성은 더욱 높다는 것이 중재판정부의 견해였다.40)


한편 이탈리아 외교부 장관의 위 1897. 3. 22. 지침에서는 경계선 획정과 관련하여 “Gonda 및 비옥한 Tzana 유역의 무역로를 완전한 지배 아래 두기 위한” 것이라고 기재된바, 중재판정부는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간 무역로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것이 이탈리아의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목적이었다고 보았다.41)


3) 1902. 5. 협상과 조약의 주된 목적의 관계


중재판정부는 상기 Ciccodicola소령의 2902. 5. 16.자 보고서에서 “(조약의) 비준이 이루어지면 Cunama는 우리에게 남게 된다”고 언급한 점42) 및 1902. 6. 28.자 보고서에서 “장차 양국 사절들이 정확한 국경선을 결정할 것이다. Cunama 마을이 에리트레아 식민지의 일부가 된다는 점은 조약 비준일에 확정된다”고 언급한 점43)을 들어 당시 당사국들이 국경선을 의도적으로 불명확하게 정하였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여 중재판정부는 1902년 조약의 “Maiteb” 이라는 명칭이 western Maiteb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44)


(나) 1902년 조약 체결 이후의 진행 상황
 

중재판정부는 1902년 조약의 해석을 위해 조약 체결 이후의 진행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보았으며,45) 이를 위해 1902. 8. 3.자 Martini의 Ciccodicola에 대한 서신46), 에티오피아의 Tigray 주지사였던 Garasellassie의 1902. 8. 8.자 서신47), 이탈리아 외교부가1902. 12. 10. 국회에 제출한 Prinetti 지도48), 이탈리아의 Istituto Geografico Militare가 1903년 제작한 지도49), 에리트레아 총독 Martini의 1903. 3. 25. 총독령50), 1904. 5. 17.자 Pollera 보고서51)와 같은 다양한 자료의 내용을 검토하였다. 또한 중재판정부는 다양한 지도들 역시 검토 대상으로 삼았다.52)


(다) 1935년의 상황에 대한 평가


중재판정부는 1935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기 직전의 상황을 다양한 자료를 통하여 분석하고 당시 Setit와 Mareb 사이 지역의 경계는 point 6와 point 9를 잇는 선을 따른 것임이 명백해 졌고 당사국들을 구속하였다고 판단하였다.53)


나아가 중재판정부는 조약의 해석은 당사국들의 “공통된 의지(common will)”를 결정하도록 대상과 목적에 합치하게 해석된 조항의 문언, 그 맥락과 협상의 역사, 그리고 이행에 관한 당사국들의 사후 행위에 따른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서부지역의 국경은 원래는 1900년 조약의 대상의 일부분이었으나 1902년 조약으로 개정됨 점54), 이 조약은 세가지 언어(암하라어, 영어, 이탈리아어)로 작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정본인 점55), 세 가지 정본 모두 국경은 세티트를 따라 동쪽으로 진행하여 특정 하천에 이르는 지점까지인 점56)을 언급하였다. 


한편, 영어와 이탈리아어 정본에는 문제된 강이 마이테브 강으로 불리고 있고 암하라어 정본에는 마이텐 강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암하라어 정본과 다른 언어 정본 간의 이러한 차이는 이 작업과 관련한 혼돈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며 당사국간 분쟁을 야기한 주요 요소 중 하나로 보았다.57) 중재판정부는 1902년 조약의 문언, 협상의 역사 및 협상 당시 사용됐던 지도들, 사후행위들을 종합하여 살핀 후, 마이테브라고 불리는 강은 포인트 3에서 세티트와 만나며, 이 지점은 코르 엄 하가르(Khor Um Hagar) 지역에서 20 킬로미터 정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 코르 엄 하가르 강의 약 89킬로미터 동쪽에서 세티트로 흘러 들어가는 또 다른 강은 몇몇 지도에서는 “마에테베 또는 마에테브” (point 4) 등으로 불리우고 있고 몇몇 지도에서는 마이텐 (때로는 “마이 텐” 또는 “마이 텐네”)이라고 불리우는 또 다른 강이 동쪽으로 25킬로미터를 더 나아가 세티트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 정확한 강과 만나는 지점이 세티트 선상에서 확인이 되면 국경은 일반적으로 동북방향으로 진행하여 마레브와 마이 암베사가 만나는 지역 (포인트 9)으로 진행한다는 점에 대하여 양 당사국이 합의하였던 사실을 인정하였다.58)


나아가 중재판정부는 서쪽 끝지점 (동경 36도 34분 지점에 위치한 point 1)과 동경 37도 40분 사이에 세티트의 우측 제방은 다음 지점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행할 경우)을 포함하는 지류들과 만나며, 마이테브 (point 3), 시토나 (point 4), 미테브 (point 5), 톰사(point 6) 및 마이텐 (point 8) 등의 지류들이 세티트와 합류하는 위치는 이전의 지도에서는 서로 상이하나, 지난 90년간의 세월 동안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중재판정부는 미테브라는 이름은 1894년 지도에서는 추후 지도에 나타나는 위치보다 다소 동쪽에서 나타나고 있으나, 그 1894년 지도에는 마이테브라는 이름을 가진 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세티트의 일부만을 묘사하고 있는 1900년도의 스케치에서 미테브라는 이름은 거의 유사한 지점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고 추후에 간행된 지도, 가령 1902년, 1913년, 1922년도의 지도에서는 마이테브 (서쪽지방)강과, 미테브(동쪽지방)의 강이 모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59)


이러한 판단에 따라 중재판정부는 양국 간의 경계를 다음과 같이 판단하였다.60)

 

  •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와 수단의 국경이 만나는 지점(Point 1)부터 Setit 강의 중심을 따라 Tomsa (Point 6)까지
  • Tomsa (Point 6)에서 동북 방향의 일직선으로 Mareb 강과 Mai Ambessa가 만나는 지점 (Point 9)까지

 

[지도 3] 서부 지역의 경계 획정61)

 


라. 동부지역


(1) 에리트레아의 주장


에리트레아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국경선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에티오피아의 Maglalla, Fiscio, Barale과 Dildi 세관사무소가 Treaty boundary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그 세관사무소는 Dankalia 암염갱에서 온 소금에 수입관세를 받아온 사실을 제시 하였다. 에리트레아는 또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 guard posts에 대하여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로 Bada와 북쪽 Dankalia 지역 주민들이 낸 세금납부 목록을 제출하였다. 덧붙여 에리트레아는 도로와 철도, 그리고 전보와 전화선을 국경까지 연결/설치했다는 것을 증명할 증거를 제출하면서, 해당 설비가 설치된 지역은 본인들의 관할이었다고 주장하였다.62)


(2) 에티오피아의 주장


한편,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1912년 Dalul지방에서 이탈리아 광산기술자 Pastori에게 영업허가를 내어 준 증거를 제출하였다. 나아가 에티오피아는 영업권보유자에게 Red Sea 항인 Marsa Fatima부터 광산에서 16km이내까지 철도를 지을 것을 요구하였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자신들이 이 지역을 관리하였다고 주장하였다.63)


(3) 중재판정부의 판단


중재판정부는 동부지역은 1908년 조약으로 규율되며, 이 조약에 따르면 경계는 해안과 평행하게 진행하되 해안에서 60킬로미터 육지쪽으로 들어와서 진행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고 전제하였다. 

 

구체적으로 1908년 조약 제1조는 다음과 같다.64)


“국경은 1900 7월 10일자의 조약에 의해 에리트레아 식민지와 Tigre에 설치된 국경의 가장 동쪽의 지점부터 동남 방향으로 계속되어, Somalia 프랑스 possession의 국경에 도달할 때까지 해안과 60km 떨어져 평행하게 진행한다.”


중재판정부는 이와 같은 조약상 명문을 기준으로 각 당사국의 추후 관행을 부수적으로 고려하여 양국 간의 경계를 다음과 같이 판단하였다.

 

  • Point 31에서 경계가 시작되어 Point 32-41까지 10개의 점들을 여러 개의 일직선으로 잇고 있다. Point 41은 Djibouti와의 경계에 있을 것이다. Point 40은 Bure의 두 checkpoints에서 등거리에 있다.65)


[지도 4] 동부 지역의 경계 획정66)
 

 


III. 의의 및 시사점


이 분쟁은 영토분쟁(경계획정 분쟁)의 심리과정에서 활용되는 다양한 국제법적 원칙을 확인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 지도 증거의 활용 및 한계


본 건은 지도 증거의 증거력과 활용방안에 관하여 상세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는 한편, 그 한계를 확인하였다. 


본건에서 중재판정부는 심리 과정에서 양국이 제출한 총 280 여개의 지도를 분석하고 선별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각각의 지도는 다양한 축척을 활용하면서 각기 다른 정보를 담고 이러한 지도 증거의 활용 문제가 중재판정부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구체적으로 중재판정부는 단지 지도에 직접적으로 기재된 내용뿐 아니라 그러한 지도에 대한 제작 당시 관련 당사국의 반응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증거력을 검토하였다. 가령 지도 증거 중 분쟁의 일방 당사국이 자신의 입장에 반하는 내용이 기재된 지도를 스스로 출간하였거나, 타방 당사국이 작성한 지도에 자신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음에도 이에 대하여 특별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경우 이러한 지도에 대하여는 증거력의 가중치를 두었다. 


한편 중재판정부는 또한 지도 증거의 내재적 한계도 아울러 확인하고 있다. 즉, 아무리 외관상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듯이 보여도 지도가 반드시 정확하거나 또는 객관적으로 지상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중재판정부는 지속적으로 언급하면서 검토하였다. 


구체적으로 중재판정부는 지도의 정보는 제작 당시 해당 지역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여부에 좌우되며 특히 오래된 지도일 수록 제작 당시의 지형 및 지역 관련 지식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가령 지도 제작을 하는 국가의 이해관계가 경계획정 문제에 투영되는 경우, 그 과정에서 제작된 지도는 아전인수격 해석을 통해 작성될 위험성이 있다고 보았다.


특히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현대적 시각으로는 과거 작성된 지도의 부정확성을 확인하고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보다 용이해졌다. 물론 당시 기술로서는 최선을 다하였음을 감안하여야 할 때도 있을 것이나 전체적으로 지도의 증거력에 대한 문제 제기 가능성은 점증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국경분쟁에서 지도가 중요한 것은 당연하나 여기에 결정적 비중을 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점에 많은 국가들이 유념할 필요가 있다.


2. 조약 해석에 있어 체결 당시의 통상적 의미 확인


조약의 해석 작업은 용이하지 않다. 언어라는 것 자체의 본질적 모호성으로 인해 그러한 언어로 이루어지는 조약 문언도 모호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동일한 단어와 문장에 관해서도 때로는 다의적 해석이 가능하며 각 당사국은 가급적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하므로, 이의 해결을 위해서는 적절한 기준이 필요하다.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Vienna Convention on the Law of Treaties, 이하 “VCLT”)가 채택하고 있는 조약 해석의 일반 원칙은 “그 문맥에 따라 조약의 문언에 부여되는 통상의 의미를 고찰하고 조약의 대상 및 목적에 비추어 성실히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문언의 통상적 의미(ordinary meaning)란 일반적으로 그 문언에 부여되는 “사전적” 의미를 말한다. 가령 “자동차”라고 규정하고 있는 경우 이는 “여객과 화물의 운송에 사용되는 내연기관의 동력으로 움직이는 사륜의 기계장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승용차와 버스는 포함되나 비행기나 선박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이 통상의 의미에 따른 해석이다. 조약의 문맥(context)을 고려한 해석이란 조약의 여타 조항의 규정 내용과 방법을 고려하여 문제가 된 해당 조항 해석의 지침을 도출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며, 조약의 대상과 목적(object and purpose)을 고려한 해석이란 조약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와 기본취지에 부합하게 해당 조항을 해석하여야 한다는 원칙이다. 


VCLT는 이러한 해석방법들을 모두 동원하여 조약을 해석할 것을 요구한다. 조약의 대상과 목적은 주로 조약의 전문(preamble)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방법으로도 조약 문언의 의미가 불명확하거나 또는 명백히 불합리한 경우에는 조약 체결의 준비 문서 및 관련 사정 등을 보충적 수단으로 참조할 수 있다. 


한편 본건 중재판정부는 소위 “동시대 의미 적용의 원칙(contemporaneity)”을 적용하며, 조약 ‘체결 당시의 상황’에 기초하여 관련 문구를 해석한다는 입장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해석 역시 VCLT가 규정하는 조약 해석 원칙 중 “통상적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는지 여부와 관련되는 문제이다. 요컨대 통상적 의미가 언제 시점의 통상적 의미인지를 묻는 것이다. 동일한 단어도 2023년의 통상적 의미와 1900년의 통상적 의미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본건 중재판정부는 조약에서 사용된 강 또는 장소의 지명의 의미와 효과는 조약 체결 당시의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에 따라 결정되고, 다양한 명칭을 보유하는 강이 존재하는 경우 중요한 것은 명칭이 아니라 명칭의 여하에도 불구하고 당사국이 의도하고자 하였던 “물길”이 어떠한 것인지 그 실질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중재판정부의 입장은 조약의 해석은 조약의 대상과 목적을 고려하고 문맥을 감안하여 통상적 의미에 따라야 한다는 VCLT 제31조에 충실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이러한 동시대 의미 적용의 원칙은 강, 지명 등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있으나 어떠한 사물, 품목, 현상 등에 대해서는 적용되기 어렵다는 측면도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현상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기존 상황이 급격히 변화하는 작금의 국제사회의 현실에서는 조약에 포함된 사물, 품목, 현상 등에 대한 기술은 지속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 가령 조약에 “상업적 활동 (commercial activities)”라는 용어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의미는 1800년대의 의미와 2023년의 의미가 상이할 것이다. ICJ는 이 경우 조약 해석이 진행되는 현재의 의미로 이를 해석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따라서 동시대 의미 적용의 원칙 자체도 사안별, 상황별로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 역시 체약 당사국의 의도를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동일한 VCLT 제31조상 원칙의 적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당사국의 추후 관행


중재판정부는 조약의 해석과 관련하여 당사국의 추후 관행을 고려하도록 한 VCLT 제31조 3항과 관련하여 이러한 추후 관행이 ‘조약 내용에 대한 변경’도 초래할 수 있다는 입장을 택하였다. 달리 말하면, 조약상 명문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당사국의 추후 관행이 이와 상이한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 그러한 관행이 조약의 내용을 변경시킬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VCLT 제31조 3항의 취지를 좀 더 폭넓게 인정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VCLT 제31조 3항의 요건을 충족하는 추후 관행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추후 관행이 여기에 포섭되는 것은 아니다.

 

4. 독립 당시의 국경선 존중의 원칙


독립 당시의 국경선 존중의 원칙(uti possidetis juris)은 1964년 카이로에서 개최된 OAU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것으로서, 1998. 6. 10. OAU 구성국의 국가 및 정부수반들이 분쟁 해결을 위하여 양 당사국에게 제시한 기본협정(Framework Agreement)에도 포함되어 있고 양 당사국은 이를 수용한 바 있다.  


더구나 1999. 9. 14. OAU 및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양국의 분쟁에 대한 고려가 이루어진 이후 양 당사국간 체결된 “기본협정 이행을 위한 기술적 합의약정(Technical Arrangements for the Implementation of the Framework Agreement)”에서도 동 원칙은 재확인된 바 있다. 또한 양 당사국은 2020. 12. 12. 알제리 협정에서도 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로부터 독립할 당시의 국경을 상호 존중하는 원칙 아래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로 경계획정을 실시하기로 재차 합의한 사실이 있다. 


중재판정부는 위와 같은 사실을 명확히 정리하면서 독립 당시의 국경선 존중의 원칙을 심리 간 반복하여 언급하며 본건 해결을 위한 국제법 규범 중 하나로 적용하였다.이 원칙은 비단 이 분쟁 뿐 아니라 아프리카, 중남미, 아시아 등 여러 지역의 국경획정에서도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다.

 


작성자 안정혜 변호사 | 법무법인(유한) 율촌
박주현 변호사 | 법무법인(유한) 율촌
감수자 이재민 교수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 본 판례 해설 내용은 작성자와 감수자 개인의 견해로 산업통상자원부의 공식견해와 무관함을 밝힙니다.

 


1) 이하 “본 사건 판정”.
2) 본 사건 판정, para. 2.7.

3) 본 사건 판정, paras. 2.9-2.10.
4) 본 사건 판정, paras. 2.11, 2.20.
5) 본 사건 판정, para. 2.12.
6) 본 사건 판정, para. 2.13.
7) 본 사건 판정, p.10.

8) 즉, 본 사건에서는 국경위원회가 중재판정부의 역할을 수행한 바, 이하에서는 “중재판정부”로 지칭한다.

9) 본 사건 판정, para. 3.2.
10) 본 사건 판정, paras. 3,3-3.4.
11) 본 사건 판정, para.3.4.
12) 본 사건 판정, para.3.5.
13) 본 사건 판정, paras. 3.14-3.15.
14) 본 사건 판정, para. 3.16.
15) 본 사건 판정, paras. 3.17-3.28.
16) 본 사건 판정, para. 3.29.
17) 본 사건 판정, para. 3.30.

18) 복수의 국가가 전쟁을 한 경우에는, 전쟁 중에 획득하거나 상실한 영토를 그대로 인정한다는 원칙으로 적용된다.
19) 본 사건 판정, paras. 3.31-3.36.
20) 본 사건 판정, paras. 2.27, 4.18.
21) 본 사건 판정, paras. 2.27, 4.31.
22) 본 사건 판정, paras. 2.29, 4.18.

23) 본 사건 판정, paras. 2.30, 4.27.
24) 본 사건 판정, paras. 2.31, 4.28-4.30.
25) 본 사건 판정, para. 4.8,
26) 본 사건 판정, para. 4.35.

27) 본 사건 판정, para. 4.36.
28) 본 사건 판정, para. 8.1.

29) 본 사건 판정, p. 98.

30) 본 사건 판정, para. 5.15.

31) 본 사건 판정, para. 2.21.
32) 본 사건 판정, para. 5.14.
33) 본 사건 판정, para. 5. 16.
34) 본 사건 판정, para. 5.17.
35) 본 사건 판정, para. 5.18.
36) 본 사건 판정, paras. 5.19-5.25.
37) 본 사건 판정, para. 5.26.

38) 본 사건 판정, para. 5.28.
39) 본 사건 판정, paras. 5. 29-5.31.
40) 본 사건 판정, paras. 5.31-5.34.
41) 본 사건 판정, paras. 5.35-5.36.
42) 본 사건 판정, para. 5.37-5.39.
43) 본 사건 판정, paras. 5.40-5.41.
44) 본 사건 판정, paras. 5.42-5.43.

45) 본 사건 판정, paras. 5.44-5.45.
46) 본 사건 판정, para. 5. 46.
47) 본 사건 판정, para. 5. 47.
48) 본 사건 판정, para. 5. 48, 
49) 본 사건 판정, para. 5. 49.
50) 본 사건 판정, para. 5. 50.
51) 본 사건 판정, paras. 5. 51-5.54.
52) 본 사건 판정, paras. 5.55-5.65.
53) 본 사건 판정, paras. 5.3, 5.13.
54) 본 사건 판정, para. 5.2.
55) 본 사건 판정, para. 5.5.
56) 본 사건 판정, para. 5.6.
57) 본 사건 판정, para. 2.21.

58) 본 사건 판정, para. 2.21.
59) 본 사건 판정, paras. 2.23, 5.83.
60) 본 사건 판정, para. 8.1.

61) 본 사건 판정, p. 96.

62) 본 사건 판정, paras. 6.25-6.26.
63) 본 사건 판정, para. 6.29.
64) 본 사건 판정, para. 6.2.
65) 본 사건 판정, para. 8.1.
66) 본 사건 판정, p.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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